1. 광주양림교회의 형성 (19041918)

 

1904

1895년 4월 미국 남장로회 소속으로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선교사는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 의사, 김윤수 조사와 함께 1904년 광주로 이주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현재의 양림교회 위치인 양림리 동산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세워 광주지역의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곳에 벨 목사는 여성들의 숙소, 학교, 사랑채 등으로 사용하기 위한 임시사택을 지어 12월 15일 경에 완공하고 12월 25일 오전 11시에 배유지 목사의 사택에서 첫 예배인 성탄절 기념예배를 드림으로써 광주에서의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벨 목사의 임시사택은 광주지역의 최초 예배당, 양림리교회이다.

광주에 선교지부가 세워져 선교사들이 거주하게 되고 남녀학교와 병원이 세워짐으로써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과 근대문명의 혜택까지 입게 되었다. 광주 선교지부는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양림산에 세워졌다.

 

1905

9월 평균 50명이 광주 예배에 출석한다고 제19차 선교회 연례대회에서 벨 목사가 보고하였다.

10월 스트레퍼 선교사(여성)가 주일 여자성경공부반을 개설하였다.

11월 영구사택의 완성으로 목포에서 프레스톤 목사 부부와 스트레퍼 선교사, 놀란 의사 부부가 광주로 왔다. 임시사택은 진료소, 학교,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1906

교회를 찾아오는 남녀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늘어나는 교인들로 인해 벨 목사의 임시사택은 협소해져 광주 대대에서 훈련장 및 무기고로 사용하던 북문안의 빈터(북문안 사창골, 현 충장로 3가)를 구입하였다.

양림리 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 40달러와 선교사들의 헌금 50달러를 합하여 3월에 공사에 기초를 놓아 5월에 “ㄱ”자형 평면의 예배당(50평)을 건축하여 가을에 옮기게 되었다. 이 지역의 이름을 땨서 “북문안교회”라 불렀다. 광주지역교회는 벨 목사의 담당으로 벨 목사는 양림리교회의 초대 당회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제1대 당회장(1904-1916) 유진 벨 목사]

“ㄱ”자형 예배당 북문안교회는 모서리 부분에 강단을 배치하여 설교자가 오른쪽 남자석과 왼쪽 여자석을 잘 볼 수 있었고 1910년대에는 600여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교인들의 증가로 확장을 몇 차례하여 1910년에는 54평의 건물이 되었다.

 

1908

1월 김윤수, 최흥종 집사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9월 교인수가 100여명으로 늘어나자 증축헌금을 시작하였다.

 

1910

1월 백만명 구령운동을 실시하여 10일간 특별집회를 가졌다. 이 기간에 60명이 개종하고 개인전도, 축호전도, 쪽복음전도를 실시하였다. 교인수는 600명으로 증가하였다. 교인수의 증가에 따라 예배당도 3회 증축하고 확장하였다.

 

1912

7월 벨 목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교회에서는 김윤수, 최흥종 집사를 장로로 장립시키는 최초의 장로 임직식이 거행되고 당회를 구성하였다. 이 때부터 교회 이름을 [북문안교회]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1914

선교사들이 오웬기념각을 건립하였다.

 

19151916

8월 남궁혁, 이득주 장로로 선출하고, 1916년 봄에 장로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제주도에서 헌신적인 선교를 하던 이기풍 목사가 과로와 질병으로 휴가를 얻어 광주에서 1년간 휴식하게 되었다. 휴식기간 중에 양림리교회를 출석하며 8월 “여전도회”를 설립하고, 당회는 벨 목사 후임으로 1916년 8월 이기풍 목사를 제2대 당회장으로 청빙하였다. 가을에 김익두 목사를 청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1917

4월 타교회에서 장로임직을 받은 홍우종, 조상학을 장립사로 세웠다.

 

2. 일제의 탄압과 교회의 수난 (19191944)

 

1919

3.1만세운동은 광주에서 기독교계 인사들과 삼합회(시민단체) 그리고 기독계 여성들이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 다수의 양림교회 교인들도 참여하였고 그 중에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김 철, 김 강, 최병준, 최한영은 3년 형을 황상호, 김철주는 2년 형을, 홍승애, 박애순은 1년 형을 선고 받았다.

삼일만세운동으로 일제에게 북문안교회당 터를 빼앗기고 벨 목사는 미국으로 귀환하였고, 4월부터 양림리 오웬기념각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때 북문안 교회 터 위에 세워졌던 예배당의 목재를 뜯어내어 보관하다가 남문 밖에 부지를 매입하고 예배당을 건축할 때 그 목재를 사용하였다.

 

1920

이기풍 목사의 입원치료(1918년)로 인해 당회장이 부재중이던 교회는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녹스 목사를 임시 당회장으로 맡게 되었다.

오웬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0월 남문 밖(금정)에 부지를 매입하고 보관하고 있던 북문안예배당의 목재를 사용하여 50여평의 예배당을 복원하였다.

교회가 건축된 후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사경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으며 「청년면려회」 를 조직하여 교회의 일꾼을 양성하였다.

 

1921

6월 남궁혁 장로가 양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선거를 실시하여 옥중에서 수감되어 있던 최병준, 김 강을 장로로 피택하였다.

교회가 안정되어 가자 북문 밖에서 교회에 참석하던 교인들이 분리해 나가 최흥종 장로를 목사로 하여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1922

남궁혁 목사가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길에 오르자, 제주도 성내교회에서 사역하던 김창국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양림동에 거주하였는데 우천시 및 동절기에 광주천을 건너 예배드리러 나오기에 어려움이 있었고,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의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하면서 예배당이 비좁아 전체를 수용하기에 벅차게 되었다. 당회는 교회를 남문밖에서 양림동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교회 이전을 반대하던 교인들은 그대로 남아 북문밖교회에서 시무하던 최흥종 목사를 남문밖교회로 전입하여 양림교회와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로 분립하게 되었다. 분립 당시 금정교회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어서 양림동으로 이전하는 교인들은 금정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예배당과 모든 부속 기구들을 금정교회에 양여하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김창국 목사가 부임한 이후 교회는 성실하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저변에는 김목사의 음악적 성향과 관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교회성가대는 광주에서 유명했다.

김목사는 청교도적 신앙을 고수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성실한 목회를 하였다.

장맹섭, 황상호 장로가 임직을 하였다.

 

1924

양림동을 옮겨온 교회는 10월부터 오웬기념각을 빌려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 건축을 준비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와 교섭하여 광주 선교부로부터 기증받은 양림동 290번지에 교회터를 마련하였다. 양림교회의 건축 및 설계는 김창국 목사, 김강 장로, 박종인 집사가 맡았으며, 1924년 4월에 시공하여 1926년 4월에 준공하였다. 교인들은 앞다투어 성물을 봉헌하였으며 지금도 스트레이퍼 선교사가 기증한 오르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예배당은 현 교회 위치에 지상 1층(60평)으로 지어진 벽돌조 함석 팔작지붕의 “양림리 예배당”이다. 숙련 기술을 요하는 부분은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하고 나머지는 봉선동 나환자 집단촌의 기술자들이, 흙을 두껍게 짓이겨서 벽돌을 만들고, 예배당 뒤편에 선교사들이 교회당 봉헌기념으로 직경이 90㎝인 종을 기증하였고, 아카시아 나무로 종각을 만들었다. 예배당은 장방형(직사각형)으로 정면에 남녀 출입문을 각각 따로 설치하였으며, 내부 회중석에는 남자와 여자가 좌우로 분리되어 앉아 예배를 드렸다. 강단의 좌우에 준비실이 위치하고 강단 양쪽에 야긴과 보아스를 상징하는 두 개의 기둥이 서 있다.

 

1928

4월 신도인 장로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11월 김승찬, 김기열 장로가 임직을 하였다.

 

1930

조형률 장로는 나주 상촌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한 후 이명하여 장로로 취임을 하였다.

 

1931

일제하의 어려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사참배 문제였다. 1931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김창국 목사는 일제의 강압정책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자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 김창국 목사의 시국관 및 목회 방침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하였다. 결국 1942년 김창국 목사는 사임을 하고 일제의 기독교 통폐합의 정책으로 감리교 목사인 정경옥 목사가 교구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934

예배당을 20평 증축하여 80평으로 확장하였으며, 종탑을 설치하였다. 양림언덕 위에 우뚝 솟은 종탑은 이 지역의 모교회로서 중후하고 엄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종탑 아래에는 다다미방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청년들이 ‘학생회주보’를 만들고 1년에 한번 ‘밀알회보’를 발행하였다.

 

1935

장맹섭 장로의 음악성은 교회의 성가대와 악대 구성에서 드러난다.

본당과 동일한 폭으로 본당의 종탑 뒤에 선신애 기념관을 이어서 건축하였다. 선신애 여사는 성경부인(Bible woman)으로 활동하면서 거금 400원을 희사하여 청년면려회의 활발한 활동을 위한 공간을 건축하였다. 선신애 기념각은 유치원, 성가대 연습실, 유년주일학교 교실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이때부터 유치원은 예배당 앞쪽에 별도로 지어 확장시켰다.

 

1936

9월 제25회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첫번째)를 개최하였다.

 

1937

김윤식 장로가 임직을 하였다.

일제는 중국 본토를 공격하면서 징병제와 종교사찰을 실시하고 양림유치원을 폐원시켰다. 당연히 교인수도 줄게 되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목사와 교인들에 대한 예비 검속을 실시하여 이유없이 연행, 투옥하였으며, 교회 내에서 황국신민서사 제창과 궁성요배를 강요하였고, 교회 종 헌납 강요, 교회의 강제 폐합과 매도, 교회의 무기고 이용, 일제 주구 교단의 창설 등 그 탄압의 방법과 양상은 매우 다양하고 잔인하였다. 그래도 조경주 조사와 조형률 장로(조아라 전도사의 부친)는 황국신민서사 제창과 궁성요배, 신사참배를 초지일관 거부한 귀감을 보여준 신앙인이었다.

 

1938

조경주 장로가 취임을 하였다.

 

1940

11월에 최준섭 장로 임직, 한종구 장로 취임을 하였다.

 

1941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12월 백영흠 조사, 김남수 집사, 김천배 교인 등이 일제에 피검되어 2~3년간의 옥고와 고문을 당하였다.

 

1942

11월 15일 김창국 목사 시무 2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1943

조일환, 이윤수, 문천식, 차문걸 장로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양림리 예배당은 일본군의 무기고로 사용되고, 종은 전쟁군수물자로 강제 징발해 갔다.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특별조치에 의해 목회자 없이 예배만 드리게 되었다. 일제 말기의 어려움 속에서 예배마저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3. 해방, 교회의 분열과 새 역사 운동 (19451958)

 

1945

해방과 동시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감옥에 갇혀있던 성도들이 출옥하였다. 출옥 성도들은 신사참배에 참여 하였던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을 향해 쓴 소리를 내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양림교회의 민족주의자 청년들이 기존의 교직자들을 향하여 분노와 아픔을 노출하였다.

일제 말기의 어려움 속에서 예배마저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해방과 더불어 담임목사직을 강제로 사임당하고 수모를 겪었던 김창국 목사를 제6대 당회장으로 다시 모셨다.

그러나 청년들은 일제말기 교회의 태도에 분개하며 김창국 목사에게 교회를 떠날 것을 종용하여 1947년 6월에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1947

김창국 목사가 떠난 후 양림교회는 과도기에 접어들면서 불안정하게 되었다.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도양술 목사를 김천배 선생이 추천하여 1946년 봄에 양림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정식 절차를 거치지 못하여 청년 담당목사로서의 역할만 수행하다가 1947년 10월 담임목사로 정식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949

4월에 나주읍교회에서 시무하던 박석현 목사가 제8대 당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취임 후 제직회와 당회를 보강하고 성례식을 춘추로 거행하며 입교와 학습, 세례문담을 실시하여 교인들의 신앙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청년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 권장 격려하였으며 교회 각 부서를 정비하고 강화하여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신앙으로나 인품으로나 모든 부분에서 교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교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5년에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1950

봄에 청년회 주최로 신사훈 박사를 초청하여 신앙강연회를 열었다. 신앙강연회를 통하여 바리새적 신앙과 기복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풍토에 청신하고 활기찬 바람을 넣어 청년들에게 커다란 도전을 심어주었다.

6월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북한군이 광주를 점령하던 시기에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교회당회록과 전남노회록을 없앨 수 밖에 없었다. 박목사는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죽겠다며 교회를 떠나지 않으려 하자 교인들은 시급함을 알리며 박목사 가족에게 피난갈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박목사는 어쩔 수 없이 피난길에 올라 진도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박목사는 교회의 식구들을 걱정하며 괴로워하다가 광주로 올라가기로 하고 장모인 나옥매 전도사가 시무하던 영암 수해교회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9월 27일 공산세력은 교회를 습격하여 박목사 일가족을 포함한 교인 50며명을 근처 소나무밭으로 끌고가 죽창과 삽으로 살해하였다.

약 2개월 동안의 인민군 치하에서 교회는 단 한차례 수요일 밤예배를 인민군의 점거로 못 드린 것 외에는 정상적으로 예배와 주일학교를 지켰다.

 

1951

3월 이북에서 월남하였던 김지석 목사를 제9대 당회장으로 청빙하였다.

 

1952

전쟁의 혼란 속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 1월 면려청년회 주최로 제1회 경로회를 마련하였다.

2월에는 학생회를 창립하고 주일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강습회를 개최하는 등 교회의 본 역할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1953

4월 목포 양동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재석 목사가 제10대 당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해방 후 6년 동안 계속된 장로교회의 교리 논쟁으로 제38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와 조선신학교, 그를 지지하고 동조하는 모든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총회에서 제거하자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호헌총회를 소집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새로운 장로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총회의 사태로 교회가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김목사는 분열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온 교인의 뜻을 모아 무총회 무노회주의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노회와 시찰회의 분열공작으로 6월 당회원을 포함한 상당수의 교인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를 이탈해 갔다. 이탈한 교인들은 오웬기념각을 임시 예배처소로 삼다가, 기념각 옆의 대지에 또 하나의 양림교회(예장 통합)를 세우게 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폐원되었던 양림유치원은 재건 후 교육 뿐만아니라 믿음의 씨앗을 심는 큰 역할을 하였다.

 

1954

분열된 양림교회는 잔류한 250여명의 교인들과 김재석 목사의 단합과 노력으로 교회 재건에 온 힘을 쏟았다.

제직을 강화하고 추계 대심방을 실시하며 4월에 해남읍에서 이명한 이성학 장로를 당회원으로 보강하였다.

6월 분열이 있은 지 1년이 되던 날 교회에 큰 파동이 있었다. 1년 전 스스로 분열해 나간 기념각파측에서 양림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하기 위해 교회를 이른 아침부터 점거하였다. 그러나 김목사의 설득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던 중 기념각파측의 박목사가 발작을 일으켜 소란이 일어났다. 이에 밖에 대기중인 경찰이 들어와 모두 해산시켜 그들의 행위는 훗날까지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이 파동을 계기로 양림교회는 교인들의 단합을 꾀하며 교회사랑의 정신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이 진정된 후 7월 초에 교회당 건물과 목사관, 전도사 사택, 교회를 관리하는 수호자의 사택등의 소유등기를 완료하고 보존등기서류를 문천식 장로가 보관하도록 하여 더 이상 이와 같은 소동이 없도록 하였다.

 

1955

5월 당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에 가입할 것을 결의하고 문천식 장로를 총대로 파견하여 정식 노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초대 전남노회장으로 김재석 목사가 부회계로 문천식 장로가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2월 김남수 장로의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1956

12월 신사훈 박사를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열었다.

 

1957

5월 선길용 장로의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양림유치원은 예배당 별관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개원하였다.

 

1958

6월 임시노회에서 주일학교 전남연합회를 조직하여 주일학교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4. 교회의 내적 성숙과 조직의 활성화 (19591967)

 

1959

충남 논산훈련소의 예배당 건축에 성도들은 정성껏 헌금에 동참하였다.

11월 목포노회 소속이던 장하원 목사가 양림교회의 청빙을 받고 제11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장목사는 교회 부동산 등기서류 및 재산 목록을 정리하고 교회 연혁을 조사 편찬하였다.

8월 30세 이상의 남자교인들로 구성된 남전도회(여전도회 1915년)를 조직하고 평신도가 중심이 되어 신앙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교회와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12월 온 교인들의 투표로 교회의 일꾼인 서리집사를 선정하기로 하였다.

 

1961

7월 홍성봉 목사가 제1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다시금 양림교회는 안정을 찾으며 차츰 성숙과 성장을 하게 된다.

홍목사는 청년 학생회의 운영과 활동에 관심을 가지며 신앙지도에 열심히 있었다. 학생회가 <광주양림교회 기독학생회 회칙>을 만들어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활동을 하였다. 기도, 전도, 봉사모임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며, 찬양과 체육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학생회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다니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일신회에서 진보적이고 학문적인 월간지 <가나안>을 만들었다.

9월에는 청년회의 종교교육부 주관으로 청년회의 소식과 성경공부, 사설 등의 내용을 담은 청년회 회지 <회보>를 만들었다.

학생회에서 발행한 <밀알>지도 있었다.

 

1964

11월 연보로 목사님의 설교, 교양적 시와 음악, 성경공부, 회계보고, 광고 등이 실린 <에덴>지를 창간하였다.

 

1965

제직회와 제직회 산하 각 부서 역시 회칙과 내규, 사업계획을 작성하였다. 제직회는 사업별로 관리부, 재정부, 교육부, 봉사부를 두었으며, 임원은 회장, 부회장, 서기, 부서기, 회계, 부회계, 각 부장 1인씩을 두었다. 그리고 각부서는 각자의 업무영역과 사업계획을 명시하였다.

담임목사의 목회서신을 권두언 및 교회 표어, 교회 생활 안내, 교회학교의 활동, 예산, 예배시간 안내 등을 담은 월간지 <월보>를 창간하였다.

5월에 김윤식, 이성학 장로의 이명을 받아들이고 시무장로로 추대하였다.

 

1966

3월 조규혁 장로가 임직하였다.

양림교회 90년사 1966년 기록에는 없다(당시에 안수집사 제도가 없었다)

90년사 1962년, 63년, 64년, 65년 기록에만 안수집사: 문안식(65년 소천)이 있는데,

당시에 장로투표에 선출되면 장립집사라 했고, 문안식 장립집사는 장입을 받지 않았다.

장립집사였기 때문에 압수집사로 불렀을 수 있다.

 

1967

교회당 건축을 위한 사항들을 논의하고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다(1966년 2월 16일).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도로 철저히 준비하였다.

3월 1주일간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비전을 세워갔다.

4월 17일 착공예배를 드리고 시공에 들어갔다. 목사관 대지에 준비한 가건물과 계명여사에서 예배를 드렸다. 4개월이 조금 넘는 8월 30일에 완공되었는데, 7월 15일에 상량예배를 드린 후 완공되지는 않았으나 7월 16일부터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0월 19일 오후 7시에 양림교회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아름답게 지어져 봉헌예배를 드렸다. 양림교회의 다섯 번째 예배당은 공사비 460만원, 연면적 204평의 철근콘크리트 라멘구조 건물이 완성 되었다.

예배당은 6칸의 베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진입계단 쪽의 1, 2층 사무실 부분이 돌출되어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진입 외부측면은 흰색 페인트를 칠한 돌출된 기둥 골조가 1층부터 지붕까지 뻗어 있으며, 기둥 사이의 벽체는 적벽돌로 마감하였다.

창문은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을 취하고 있는데 예배당 벽체의 창문은 처마부분까지 길게 뻗어 있어 돌출된 기둥과 함께 수직선을 강조하고 있다.

지붕은 박공형태로서 출입구가 있는 정면 지붕 끝부분에 십자가를 설치하여, 전체적으로는 근대 기능주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 교회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하 1층은 사교실(식당)과 조리실, 지상 1층은 교육관, 유치원, 주일학교 및 여신도 사무실, 외부에 화장실 및 창고, 2층은 대예배실과 유아실, 당회실 겸 사무실로 사용되었는데, 대예배실은 중2층으로 구성되어 정면 중앙에 강단이 있고, 강단 왼쪽에 장로석(후에 성가대석), 중2층은 성가대석(후에 회중석)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후 조금씩 성전의 모습이 더해져갔다.

1968년 6월에 교회학교 사무실을 목사님 사무실로 변경하였다.

1970년 5월부터 담돌 모으기 운동을 전개하여 7월초에 축석공사에 들어가 20여일 동안의 공사로 아름답게 정리하였다.

1974년 6월에 유치원 출입구를 교회건

 

5. 선교지평의 확대와 민주화운동, 사랑의 멍에를 멘 양림교회 (19681983)

 

1968

5월 목포중앙교회에서 시무하던 윤재현 목사가 제13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윤재현 목사 부임 후 양림교회는 새로운 도약의 단계에 들어섰다. 교인수와 교회재정이 대폭 증가하였다.

예배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더욱 정성스럽게 드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11월 월정헌금제도를 주정헌금으로 젼경하고 주보함을 제작하여 주보의 관리 및 효율성을 증대하였다.

 

1969

5월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주일예배를 드렸다.

6월 정익섭 장로가 임직하였다.

 

1971

종전의 찬송가 대신에 개편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었다.

 

1972

성탄절 헌금은 선교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그 중 5만원을 상무대 군인교회 건립헌금으로 지정하여 도왔다.

 

1973

3월 이양훤 장로가 협동장로로 취임하였다.

교회의 발전을 위한 장기계획위원회를 만들었다.

 

1975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아래에서 1월 ‘오늘의 선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4월부터 70여년이나 되는 양림교회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정익섭 장로를 위원장으로 역사편찬위원회의 업무를 분담하고 12월 교회창립 70주년 기념예배 중에 교회약사 보고가 있었다.

6월 22일 박홍배, 배두현, 오준길 장로의 장로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8월 20일에 교육관 기공예배를 드린 후 건축공사를 시작하여 교회창립 70주년을 기념하는 12월 21일에 교육관을 준공하여 “70주년 기념교육관”이라 칭하였다.

지상 2층(1층은 사택과 교양실, 2층은 교육관), 지하 1층(당회실), 연면적 124평의 철근콘크리트 라멘구조에 총 공사비 1,100만원이 소요되었다.

교회학교의 교육, 노회와 시찰회 및 지교회의 각종 회집 및 지역사회 봉사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1976

윤재현 목사의 사임으로 교역자가 부재중이었지만 교인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원주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6월 전주남문교회에서 시무하던 은명기 목사가 제1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은명기 목사는 목회방향을 “선교의 사명”으로 제시하고 선교 지평을 확대해 나갔다. 사회정의와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인권은 신권”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사셨다.

 

1977

8월 광복절 33주년 기념연합예배를 통하여 광주의 인권운동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자유와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12월 교회 부지의 소유권 명의를 총회 유지재단으로 이전하였다.

 

1979

7월 명노근, 홍천표 장로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9월 제64회 기장총회를 개최(두번째)하여 ‘나라와 갇힌 자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1980

5월 5.18 광주민주화운동 주모자로 은명기 목사, 명노근, 이성학 장로와 교회 청년들이 수배와 투옥이 되었다.

은명기 목사의 유고로 고민영 목사가 대리당회장을 맡아 교회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해 가을 목사님은 유고였지만 성도의 신앙과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10월 대심방을 전도사, 장로, 여신도가 주축이 되어 실시하였다.

 

1982

5월 김용식 장로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8월 전남노회 산하 평신도를 대상으로 김동길 교수, 김상근 목사, 고민영 목사를 강사로 제1회 신도선교대회를 열었다.

 

1983

5월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故 윤재현 목사의 정신을 되새기며 설교집 「사랑의 멍에」 출판기념회를 갖고 주안에서 하나로의 일치를 꾀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교회를 주목하고 감시하였다. 예배의 설교 말씀을 모니터링하고 전화기를 도청하고 주일에는 형사가 상주하였다. 여러 가지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자 은목사는 스스로 사임을 하였다.

총회에서 결의한 한신대학예배당 건립을 위한 기금의 일부를 한신대학에 보내기로 하고 이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월 첫 주일에 한신대학 예배당 건립헌금 봉투를 교인들에게 배포하고 수시로 헌금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였다.

12월 교회가 분립되어 일부교인들이 고백교회 설립하였다.

 

6. 교회성장과 새성전 건축 (19842003)

 

1984

1월 서용주 목사가 제15대 당회장으로 부임하고 4월에 취임하였다. 서용주 목사는 양림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서용주목사의 부임으로 교회는 교회의 질서를 새롭게 하고 교인들의 내면적 성숙을 위해 애를 썼다. 부서 체계를 세우고 각 부서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지도하고 구체적으로 역할을 규정하여 교회를 잘 섬기고 신앙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매월 마지막 주일 낮예배 후 각 부서별로 모임을 진행하였다. 규정을 정하여 예배와 성례에서부터 교우들을 서로 돌보는 과정까지 모든 것을 교회를 섬기고 신앙을 실천하는 과정으로 이끌었다.

전교인 하기수양회를 8월에 헐몬수양관에서 개최하였다. 예배의 갱신과 더불어 교인들의 신앙교육을 강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985

6월 정선종, 노근섭, 노성만, 권태홍 장로의 장로임직식을 거행하였다.

 

1987

2월 손재석 장로의 취임이 있었다.

 

1989

2월 서용주목사가 시무 사임의 의사를 밝히고 사임하자 후임으로 전태국 목사를 모시기로 전원 일치로 의결하여 추진하였다.

5월 14일 제16대 당회장으로 전태국 목사가 취임하였다.

 

1990

2월 신앙교육을 위해서 제1회 베델성서연구반이 개강예배를 드리고 성서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4월 광산구 도산동 689번지에 300평의 땅을 매입하였다.

교회학교 중등부에서는 자체적인 문예지인 <겨자씨>를 창간하여 발간하였다.

5월 진성구, 선영신 장로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8월 헐몬 수양관에서 전교인 수양회를 갖었다.

 

1991

4월 제93회 전남노회가 양림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번 노회에서 광주노회가 전남노회에서 분립하게 되는 역사적인 노회가 되었다.

신앙교육을 위한 제1회 베델성서연구반이 졸업예배를 드렸다.

 

1992

10월에 당회 산하에 특별위원회로 성전건축위원회와 90년사 발간위원회를 두기로 하였다. 교회소식 및 교우의 신앙지도, 교회내의 문제점과 해결방안들,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고 교회에서 계획하는 모든 사업들을 공유하고자 교회회보 <양림을 찾는 주님의 손>의 발간을 기획하고 연 4회 발행하기로 하였다.

 

1993

전태국 목사는 교회가 해야 할 3대 사명으로 선교, 교육, 봉사를 꼽는다. 선교분야에서는 구역운영의 활성화, 전 교인이 한명씩 전도, 대외선교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수요예배에는 전태국 목사가 직접 만든 교재로 사도행전, 마가복음, 로마서, 창세기를 공부하고 단행본으로 발행하였다.

5월 김영자, 문원호, 문명호 장로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1994

새 성전이 건축되었다.

1990년 10월 성전건축을 위한 교인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78%의 찬성이 있었고,

1992년 1월 제1회 성전건축 준비위원회 모임을 갖었다.

1992년 3월 3일 오후 예배 후 기념관 2층에서 성전건축위원회 협의하다.

1993년 5월 교회건축을 위하여 기장 교단 가운데 아름답게 건축한 성전을 모델로 삼기 위해 군산금성교회, 이리제일교회, 전주중앙교회를 9명이 답사하였다.

8월 건축을 위한 특별새벽기도회를 갖었다.

9월 71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신축교회의 정문이 서게 하였다. 건설업체로 남광건설로 정하고 총 17억원의 예산으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1994년 4월 3일(부활절) 오후 3시 성전 기공식을 시작하여 성전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2월 25일 성탄절 오후 5시에 교회창립 90주년 기념 성전 머릿돌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정초식에는 입함식을 가졌는데 성경(개역,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찬송가, 건축헌금자 명단, 1994년 교회수첩과 주보철을 함께 입함하였다.

성전 머릿돌은 박홍배 장로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것이며, 제호 ‘하나님의 영광’은 전태국 목사의 글이다.

 

1995

4월 18일 창립 90주년 기념식 및 새성전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여섯 번째 예배당은 연면적 1,050평의 철근콘크리트 라멘구조 예배당으로 지하 1층(기계전기실, 주방, 친교실, 기도실, 성가대실, 교육실, 권사실), 1층(소예배실, 사무실, 당회장실, 당회실, 도서실, 회의실, 화장실), 2층(예배실), 3층(자모실, 예배실), 4층(전기실, 기도실), 5층(옥상, 종탑)의 구조이다.

외벽은 붉은 벽돌 마감으로 자연적 질감을 내고, 정면에 두 개의 화강석 기둥(야긴과 보아스를 상징)과 두 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알파와 오메가를 상징하는 지붕을 받치고 서있고, 유리창은 스테인드 유리를 설치하고, 정면 계단과 창의 수를 완전수인 7개로 하였다.

교회창립 90주년 기념행사로 양림동전 그림 사진 전시회, 꽃꽂이 전시회, 양림가족 만남의 광장, 성가경연대회를 실시하였다.

12월 성탄절을 맞이하며 <양림교회 90년사 자료집 제1권>을 발간하게 되었다.

 

1996

1월 이병대 장로가 시무장로로 취임하였다.

2월 <대회선교>를 창간하여 농어촌교회와 개척교회를 돕고 해외선교를 위한 일익을 담당할 목적으로 하였다. 선교헌금 명단, 후원금 현황, 선교회원들의 간증, 선교소식 등을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3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대표단이 내방하여 해외와의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지역사회만이 아닌 세계에로 시야를 넓히도록 도움을 주었다.

4월 <양림교회 90년사 자료집 제2권>을 발행하였다. 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 6,000회 방송기념 광주특별공개방송을 가졌다.

6월 故 박석현 목사의 신앙을 기리며 순교비 제막식을 교회 정원에서 가졌다.

9월 제81회 기장교단총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제로 개최(세번째)되었다.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양림공동체 전도축제의 날’행사를 3개월 동안 준비하여 진행하였다.

 

1998

‘세상을 위해, 세상을 섬기는 교회’를 내걸고 교회창립 100주년을 향한 준비, 사회복지재단 건립, 크리스찬 훈련원의 활성화, 교회발전을 위한 장기정책수립을 중점사업으로 정하였다.

4월 광주노회 제100회 정기노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4월 30일 세 양림교회(기장, 통합, 합동) 목회자가 회동하여 형제가 하나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화해와 연대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올해부터 매년 가을에 연합찬양예배를 개최하기로 하고 장로들로 구성된 양림교회협의회를 조직하여 첫 예배를 9월 26일 호남신학대학 대강당에서 ‘사랑나누기 양림음악회’ 의 예배와 연합찬양의 순서를 갖고 한 뿌리임을 확인하였다.

10월의 부흥사경회를 맞이하는 40일 동안의 특별새벽기도회 9월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11월 ‘겨자씨 선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지상명령인 선교사업에 뜻과 힘을 모으기 위해 창립되었고 목회자 33명의 발기인이 참여하였다.

 

1999

4월 ‘제1회 세 양림교회 신도체육대회’를 통해 세 양림교회의 우애를 다졌다.

8월 양림교회의 홈페이지(www.yangrim.or.kr)가 개설되어 온라인을 통해서 교회의 소식과 말씀의 사역, 중보기도팀 사역, 봉사 사역 등 다양한 사역들을 접해 볼수 있게 되었다.

6월 선교의 비젼을 품고 캐나다 그랜드캐쉬교회를 방문하여 자매결연을 맺고 교우들의 인식을 세계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1월 제2회 광주양림교회 연합찬양예배를 본교회에서 드리며 함께 찬양으로 하나가 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2000

1월 교회재정에 개혁방안으로 헌금의 명목을 과감히 줄이고 십일조 생활을 실천하도록 결정했다. 특별헌금을 하나로 통폐합하였고 주일헌금은 사용처를 미리 주보에 공고하였다. 그동안 사용해온 성경을 <개역개정판 성경>으로 바꾸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희관 장로를 협동장로로 임명하여 함께 당회업무를 치리하도록 하였다.

교육부서의 원활한 조직운영과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교육전도사를 청빙하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2월 제9회 빛고을 신앙강좌를 개최하여 사회복지에 대한 교회의 사명과 교회 사회복지 사업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다.

4월 캐나다 그랜드캐쉬 연합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7명의 교우들이 방문하여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역사유적지를 탐방하며 큰 기쁨을 나누고 돌아갔다.

5월 조윤호 장로(4대째 장로 ; 조경주 장로(1938년), 조일환 장로(1943년), 조규혁 장로(1966년))의 장로임직식이 거행되었다.

6월 목사님과 교인들이 금강산에서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갖다.

10월 종합사회복지관 건립 허가를 받고, 11월에 양림종합사회복지관 건립을 위한 건축위원회와 후원회 그리고 이사회가 구성되었다. 12월 30일 기존의 교육관 자리에 기공식을 거행하여,

 

2001

2월 광주광역시로부터 사회복지법인 양림의 법인설립 인가를 받고 11월 20일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양림예배당 뒤편의 옛 교육관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708평 규모로 지어졌다. 12월 개관예배를 드리고, 지역사회에서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복지욕구를 가진 장애인, 어르신, 저소득가정, 소년소녀가장, 요보호 대상자 등에 직접적인 복지서비스를 제공하여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의 삶을 위로하고 감싸주며, 일반 주민에 대한 교육, 정보제공, 연대감 조성 등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통해 아름다운 지역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2001

6월 전도의 활성화를 꾀하던 중 ‘전도 달란트 마일리제’를 실시하여 전도자에게 전도 및 양육 실적에 따라 전도 달란트를 부여하고 우수 전도자에게는 성지 순례 기회를 제공하였다.

 

2002

3월 양지종합사회복지관은 <사랑, 꿈, 행복>이라는 계간지를 창간한 뒤 <햇살 가득한 동산>으로 제호를 바꾸어 출간하였다.

주일저녁예배를 대신하여 가정예배를 드리는 획기적인 예배 혁명이 있었다. 가정예배를 드리도록 권면하면서 주보 3면에 가정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양림의 만나> 자료를 실어 제공하였다. 가정예배의 붐이 일고 이로 인한 감격을 간증으로 나누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함께 했다.

광주공동묘지의 분할 등기 건으로 광주노회와 어려움을 겪고 무노회를 선언하였다.

 

2003

예배에서 멀티미디어 기기를 이용하여 영상과 음향이 조화된 영상예배를 실시하여 예배의 분위기를 살리게 되었다.

4월 광주노회 105회 정기노회에서 기장의 희년 정신에 따라 용서와 화해로 해결하기로 하고 그간의 어려움을 서로 푸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5월 1일 양림교회에 큰 슬픔이 발생하였다. 전태국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갑작스럽게 받게 되었다. 별세하기 바로 전 수요예배에서 ‘듣고 준행하라’는 설교를 마지막으로 하고, 다음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귀가한 후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도 당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가감하지 말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6월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기 위해 40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작정하여 진행하였다.

8월 성가대의 찬양 가사를 주보에 싣기 시작했다.

11월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최학휴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의하였다.

100주년 행사준비위원회는 세 양림교회 100주년 연합찬양제, 양림동 성역화 작업, 양림교회 100년사 출판과 양림교회 가족사 발간, 국내외에 사는 양림교회 가족 초청, 교회 개척과 해외 선교 지원, 양리교회 100년사 사진 및 사료전시실 개관을 기획하였다.

12월 양림교회 99주년을 기념하여 [양림교회 100년사(1) 1904-1953]을 발간하였다. 세 양림교회(기장, 통합, 개혁)가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출판하였다.

 

7. 세계를 향한 선교와 교회의 미래 (20042016)

 

2004

3월 제17대 당회장으로 최학휴 목사가 부임하였다.

교회의 로고를 제정하고, 특별새벽기도회를 40일간 진행하며 365일 릴레이금식기도회를 시작하였다.

5월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로 홈커밍데이 ‘아름다운 양림음악회’를 개최하여 찬양과 감사의 시간을 갖었다.

6월 100주년 사료전시관인 ‘양림교회 역사관’을 개관하였다. 100주년 기념 T셔츠를 판매하여 선교사업을 위해 사용하였다.

9월 7일간 케냐 선교센터, 의료선교 지원을 위해 김용식, 노성만 장로가 답사하고 양림교회가 넓은 세계를 향해 펼쳐야 할 선교사업을 체험하였다.

10월 100주년 기념음악회(제7회 연합음악회)를 광주문예예술회관 대극장에서 개최하였다. ‘양림이여 영원하라’는 칸타타의 가사를 세 교회 담임목사가 직접 작사하였다. 총 8곡으로 구성된 칸타타 가운데 제2곡은 최학휴 목사가 작사하였다.

12월 100주년 기념전시회 ‘100주년의 발자취’ 행사를 역사관에서 가졌으며 성탄 전야제로 ‘100년의 역사 돌아보기’ 시간을 가졌다. 성탄절에는 100주년 창립기념예배 및 성탄축하 찬양예배를 성황리에 개최하고 케냐의료선교위원회를 결성하였다. 26일에는 100주년 기념 홈커밍 음악회를 개최하여 친교의 밤을 보냈다.

 

2005

1월 17일~2월 25일(40일간) 새벽 6시 30분에 어린이 특별 새벽기도회를 실시하였다.

1월 30일 케냐의료선교단 파송예배를 린튼 박사를 강사로 드렸다.

2월 3일~13일(11일간)에 선교 2세기를 맞아 복음의 빚진 자로서 민족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향한 구원의 방주요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을 다짐하며,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가난과 질고로 고통당하는 아프리카 케냐 니에르시에 영성센터(교회, 병원, 학교, 기타 부대시설)를 세우고 앞으로 100년 동안 아프리카 선교하는 것을 소망하고 제1차 케냐의료선교를 15명의 대원으로 의료선교활동을 펼치고 영성센터 기공예배 및 오픈하우스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교인들은 선교단이 돌아오는 날까지 의료선교활동을 잘 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특별새벽기도 모임을 하였다. 케냐 의료선교단의 활동을 담아 9월에 ‘케냐에 새벽을’이라는 책자를 백서로 발간하고 선교엽서를 제작하였다.

5월 15일 홍정애, 송정자, 홍 정, 김상채, 김형곤, 오석인 장로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8월 13일~24일(12일간) 미국 시카고로 크리스챤 리더그룹 해외연수를 15명이 실시하였다.

9월 27일~30일(4일간) 제90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를 “은총의 하나님 세상을 변화시키소서”란 주제로 개최(네번째)하였다.

10월 한달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눈을 들어 주를 보라”는 주제로 5시, 6:30, 7:30 세차례에 걸쳐 실시하였다.

10월 9일 제8회 세 양림교회 연합찬양예배(개혁)가 호남신학대학원 대강당에서 열렸고 29일 세 양림교회 친선 한마음 체육대회가 호남신학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렸고 31일에는 세 양림교회 교역자, 장로 부부 친교모임을 본교회 지하식당에서 가졌다.

11월 24일 인도 남인도교단 목회자들의 본 교회 방문 및 5.18묘역 방문이 있었다.

 

2006

1월 2일~26일(25일간) 오전 6:30 지하유치부실에서 어린이 특별새벽기도회를 갖었다.

1월 22일 제2차 케냐의료선교단 파송을 위한 예배를 저녁예배시간에 드리고, 1월 26일~2월 5일(11일간) 17명이 의료선교를 펼치고 영성센터의 상량예배를 드렸으며 선교의료단의 활동상황을 광주 MBC-TV에서 촬영하여 “굿모닝 아프리카”란 제목으로 4월 5일, 4월 30일 전국에 방영되었다.

3월 12일 양림교회 2020 장기발전기획위원회를 외부인사를 포함하여 발족하였다.

4월 22일 호남신학대학 운동장에서 세 양림교회 체육대회를 개최하였다.

8월 1일~4일(4일간) 군산 옥봉교회에서 청년부 국내단기선교 “하나님 마음으로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자”라는 주제로 어린이성경학교, 노방전도, 의료봉사, 경로잔치를 갖었다.

10월 22일 제9회 세 양림교회찬양예배를 본교회당에서 열었다.

11월 19일 예수초청 큰 잔치, 총동원전도주일을 펼쳐 138명이 새롭게 등록하였다.

 

2007

2월 12일~24일(13일간) 제3차 케냐의료선교단 22명이 의료선교를 펼치고 예수영성센터 헌당예배(2.15) 및 터키 성지를 순례하였다.

4월 8일~10일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맞이 교회의 활력과 부흥을 위하여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는 주제로 김석년 목사(서울 서초교회, 기성)를 강사로 전도훈련세미나를 개최하였다.

5월 13일 방은혜, 이선덕, 최상순 장로와 20명의 권사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5월 24일 여수 오동도로 전교인 야유회를 다녀왔다.

7월 30일~8월 2일 익산 구평교회에서 청년부 국내단기선교를 개최하였다.

10월 13일 화순 다지리 근린공원에서 전교인 체육대회 행사를 실시하였다.

10월 14일~16일 강영우 박사(미 백악관 장애위원회)를 모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도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주제로 신앙간증집회를 하였다.

11월 18일 예수 초청 큰 잔치를 열어 총동원 전도주일로 지켰다.

 

2008

2월 23일과 4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서해안 태안지역 유류 유출 재해 지역의 자원봉사를 다녀왔다.

3월 29일 청년부에서 제3남신도회까지 가족동반으로 “2045 하나되기” 행사를 수피아여고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4월 21일~24일(4일간) 제110회 광주노회 정기노회를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그리스도”란 주제로 본교회에서 가졌다.

6월 10일~8월 26일(12주간) 제31기 빌립전도훈련을 개최하였다.

8월 22일 청년부 주관으로 주민을 위한 “한 여름밤의 축제”를 개최하여 경로잔치와 야외영화를 상영하였다.

8월 29일 심장병환자를 돕기위한 “사랑의 음악회”가 어려운 가정의 심장병 환자를 무료로 수술하기 위하여 밀알선교회심장재단이 주최하는 예배를 드렸다.

8월 31일 양림교회 100년사 2부를 출판하였다.

10월 25일 전교인 체육대회를 화순 다지리 근린공원에서 행사를 진행하였다.

 

2009

1월 22일~2월 1일(11일간) 제4차 케냐의료선교단 23명이 의료선교를 펼치고 영성센터 내에 아프리카 예수진료센타(하니병원) 기공예배(1.28)를 드렸다.

2월 23일~8일 교회학교(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다.

5월 17일 조은덕, 이광용, 장상용, 이문창 장로와 19명의 권사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5월 24일 고흥군 소록도로 전교인 야외예배를 개최하였다.

5월 31일 수양관 건립 대지 구입을 위한 공동의회가 있었다.

6월 18일, 7월 16일 제111회 광주노회 정기노회가 “생명의 영이시여, 온 세상을 살리소서!”란 주제로 본교회에서 진행되었다.

8월 30일 심장병환자를 돕기위한 “사랑의 음악회”가 어려운 가정의 심장병 환자를 무료로 수술하기 위하여 밀알심장재단이 후원하는 예배를 드렸다.

10월 18일 제12회 세 양림교회 연합찬양예배를 본교회에서 개최하였다.

 

2010

1월 3일 새찬송가로 찬송가를 바꾸어 예배를 드렸다.

8월 29일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위한 “사랑의 음악예배”가 어려운 가정의 심장병

환자를 무료로 수술하기 위하여 밀알심장재단이 후원하는 예배를 드렸다.

10월 6일 “엄마의 기준이 아이의 수준을 만든다”, 13일 “백만불 장학생 엄마되기”라는 주제로 지역주민 초청 자녀를 성공으로 이끈 엄마에게 듣는 자녀양육비결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0월 23일 군산 새만금 방조제와 부안댐 문화관, 채석강을 돌아보는 전교인 야유회를 개최하였다.

 

2011

1월 27일~2월 5일(10일간) 제5차 케냐의료선교단 27명이 의료선교를 펼치고 하니병원 봉헌예배 및 개소식을 거행하였다.

4월 29일 여신도회 성막 견학 및 양화진 탐방을 실시하였다.

5월 10일 전교인 명랑운동회를 노대동 빛고을 노인 건강타운 다목적체육관에서 행사를 진행하였다.

5월 15일 정근채, 최 현, 최 찬 장로와 19명의 권사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5월 18일 “성경적인 부모상”, 25일 “지지하는 가족, 포용하는 공동체”를 주제로

양림 가족세미나를 개최하였다.

 

2012

1월 19일~28일(10일간) 제6차 케냐의료선교단 24명이 의료선교활동을 펼쳤다.

6월 6일 화순 안양산휴양림으로 전교인 야유회 행사를 진행하였다.

11월 11일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양림가족 찬양제”를 개최하였다.

12월 22일 전도양성부와 새가족부 주관으로 “기쁜 성탄 사랑 나눔 전도” 행사를

진행하였다.

 

2013

1월 25일~26일 호남신학대학 명성홀에서 “청년이여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어라”라는 주제로 광주노회 청년연합 동계수련회를 개최하였다.

4월 21일 31사단내 삼일교회에서 진중세례식을 거행하였다.

5월 4일 전교인 체육행사를 노대동 빛고을 노인건강타운 다목적체육관에서 열었다.

5월 26일 다문화선교마당을 열고 다문화 음식축제와 다문화마당 행사를 가졌다.

10월 13일 제16회 광주양림교회 연합찬양예배를 대예배실에서 드렸다.

10월 19일 비젼파워 찬양팀 초청 청소년부 찬양제를 청소년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진행하였다.

11월 3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WCC 제10차 총회에 참석중인 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원 교수와 학생 18명이 본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11월 10일 음영위원회 찬양부 주관으로 양림찬양제를 개최하였다.

12월 25일 교회창립 109주년 성탄축하예배를 드렸다.

 

2014

1월 2일~12일(11일간) 신년축복새벽기도회를 가졌다.

1월 24일~2월 1일(9일간) 제7차 케냐의료선교단 37명이 의료선교활동을 펼쳤고 통합양림교회 교인들이 합류하여 더욱 의미를 가졌다.

4월 28일~30일(3일간) 전경호 목사를 강사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부흥사경회를 가졌다.

5월 25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기도주일”로 애도를 드렸다.

11월 30일 오후예배에서 31명의 권사를 임직하는 예배를 드렸다.

12월 25일 성탄축하 교회창립 11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2015

3월 11일 청년부 “꿈꾸는 요셉”을 주제로 뮤지컬 예배를 드렸다.

4월 21일 제117회 광주노회에서 당회장 최학휴 목사가 노회장으로 취임하였다.

5월 3일 본교회 주관으로 군선교연합회 광주지회 31사단 신병교육대(삼일교회)의 진중세례식을 거행하였다.

5월 18일~20일 부산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님을 강사로 “2015 은혜와 축복” 말씀사경회를 가졌다.

5월 21일 제117회 광주노회 정기노회에서 최학휴 목사가 노회장으로 취임하였다.

5월 30일 완도 수목원으로 전교인 야유회를 다녀왔다.

12월 19일 오웬기념각에서 배유지 선교사 내한 120주년 기념예배를 여러 교회가 합력하여 드렸다.

 

2016

2월 5일~13일(9일간) 제8차 케냐의료 선교를 통합양림교회와 함께 42명의 대원들이 의료선교활동을 실시하였다.

5월 1일 박청휘, 남종희 장로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새생명축제 총동원주일을 위하여 4월 3일 전교인이 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한 영혼을 인도하는 선포식을 갖고 50일 연속기도를 시작하였다.

4월 17일에는 이지은 집사(춘천 한마음교회) 초청간증예배로 드리고

5월 16일~22일 “내 집을 채우라”는 주제로 새생명축제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다.

5월 22일 새생명 축제 총동원주일 행사를 진행하였다.

5월 18일~20일 제118회 광주노회 정기노회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의 주제로 진행하고 최성욱 목사를 케냐 국제협력선교사로 파송 승인을 받게 되었다.

10월 16일 세 교회가 함께 모여 제19회 광주양림교회 연합찬양예배를 드렸다.

10월 29일 염주체육관내 체육회관에서 전교인 체육대회 행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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